좋은 글

사과 나무 중에서

하쿠나마타 2010. 8. 12. 22:07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꺠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T.S엘리어트의 황무지 중에서

 

착각은 자유니까 그녀의착각에 우리는 어떤 법적인 고소를 할 수도 없다.  떄로는 착각도 행복으로 가는 청룡열차다.

 

예뻐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정말 예쁜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동일성 없는 사람들이 이루는 하나인가, 아니면 모두 동일한데 단지 수적으로만 구분되는 여럿인가.  그 말이 그 말 같고, 어찌보면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 문제가 현실의 실천에서는 아주 큰 차이을 낳는다.

 

"내가 하느님의 축복을 못 받아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

"아주머니가 축복을 못 받으신게 아니에요. 사람마다  받는 축복의 종류가 다를 뿐이에요"

"정말 그럴까?"

 

 나는실에 충실하고 미래를 확신하지는 않는ㄴ다. 몇 년 전 내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했듯 몇 년 후 내가 또 다른 누군가를 좋아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지금의 마음이 두고두고 오래 간직되기를 바랄뿐이다.

 

우리들 인생 또한 그렇지 않을까. 긴 망설임 이후 단 한순간의 선택.  선택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1초면 충분하디.  우리도 자비에처럼 어떤 것을 선택하기 위해 지금 엉뚱한 곳에서 방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랑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다.

 

걷기는 말하기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몰랐던 내 성질에 스스로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욱'하는 성질에 성격도 얼마나 급한지. 그 반면에 소심하고 눈물도 많은 편입니다.  마음을 그렇지 않은데 말이 헛나갈 때도 있어요. 그래서 후회도 많이 한답니다.  걱정은 또 얼마나 많은지....  요즘 이런 나 때문ㅇ 참 속상하답니다.  아직도 내 자신을 잘 모르겠어요.

 

당신의 무관심이 나를 지치게 합니다.  당신의 소홀함일 나를 외롭게 합니다.  당신은 그런 나에게 이해하라고만 하네요.  그건 사랑이아니라 일방적인 희생 아닌가요? 이제 당신과의 사랑을 멈추려고 합니다.

 

다시,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지금은 비록 안개 자욱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며 글을 쓰지만, 언젠간 파란 창공를 가르며 비행기안에 있을 내 모습을 기대합니다.  그땐 <안개 낀 날>이 아니라 <무지개 뜬 날>의 글을 쓸수 있겠지요?

 

칼바람이 매섭다. 겨울 같지 않게 포근하더니, 이제야 겨울다워졌다.  '...다워진다는 것'은 긍정적인 뜻을 담고 있다.  으래 그래야만 하는 모습으로 되어간다는 뜻이니까.  비로소 겨울다워졌건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 한 구석은 그리 편하지 않다.  겨울이 겨울다워질 때 고통이 깊어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긍휼의 사람, '함께 고통당하는 사람'이었다. 시련과 번민과 고통.... 이것은 인생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겨울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인생의 눈보라에 슬피 울며 매서운 칼바람에 주저앉을 때가 있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 사람들, 그들을 위해 '함꼐 고통당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많아지면 좋겠다.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 말이다.  시ㅣ련당하는 자들과 우리의 눈물이 한 데 엉킬 때, 이 세상은 좀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너무 자학하는 거 아니야?"

"....."

사실 그런 말을 들으면 구타당하는 느낌이 든다.  마음이 멍든다.  특히 남의 불해에 대해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는 이들이 그렇게 말할 때면, 그들의 야박함이 종이집과 종이이불 만큼이나 민망하기 그지없다.  고통을 좋아할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고통 자체는 꺼려진다 할지라도, 고통을 당해 신음하는 인간만큼은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공도 중요하고 돈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죽을 때 가져가는 건 기억밖에 없는것 같다.

 

간호사의 손을 더러워져도 더러워지는 만큼 환자는 병이 낫는 거잖아요. 그래서 간호사의 손이 아름다운 거예요.

 

나는 수업시간에도 아이들에게 꿈 이야기를 자주 해주는 편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언제나 시큰둥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아이들은 최고가 되어야만 꿈을 이루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최고가 될 수 없는 아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최고가 되라는 말은 곧 꿈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들면 인간은 딱 두가지 길 뿐이야. 흰머리 아니면 대머리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렵 나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믿음 하나를 키워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까마득해 보이는 것도 기다림이 깊어지면 돌아오리라는 따뜻한 확신 같은 거 말디ㅏ.

 

당신에게

나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나요?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어떻게 비춰지길 바라나요?

 

"우리 집엔 의자가 세 개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두개는 우정을 위해, 세 개는 사교을 위해서."라는 말도 남겼다.  숲속에 외출했다 돌아와 오두막 안에 담배냄새가 배어 있는 것을 느끼면서 "아, 친구가 다녀갔구나"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그는 철저한 고독의 실험을 통해 인간세상의소중함을 더욱 강조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회개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웃을 줄 아는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베르그송은 "인간은 웃게 말들 줄 아는 존재"라고 했다 곧 사람에게는 웃을 수 있는 능력과 웃길 수 있는 능력 모두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근데, 누나 다음에 길 잃어버렸을 때는 우선 하늘을 봐, 그 다음에는 주위를 살펴봐. 그리고 딴 생각하지 말고 길을 좀 봐.  길 찾을 때는 길 찾는 생각만 해, 사실 좀 전에 누나 계속 딴 생각했지? 찬찬히 보면 누구나 찾을 수 있어."

"모르겠어. 무슨 생각 했었는지.  근데 하늘 보면 뭐가 달라져? 난 타고난 길치인데."

"난 그러면 마음이 맑아지던데. 그리고 나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힘이 나."

 

 가끔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느끼는 건 좋은 일이니까, 아픈 마음조차 내겐 소중하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땐 너무 힘들다.  아픈 마음조차 내겐 소중하다.  사람들은 행복한 순간에도 그 행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혹은 걱정 때문에그 순간을 완전히 즐기지 못한다.  나도 그중 하나일까?  가끔 나는 기도한다.  "내게 주어진 모든 행복을 온전히 누리게 해 주세요"하고.

 

요즘은 너무나 외롭고, 슬프고, 지루한 나날의 연속입니다.  방학이라 딱히 할 것도 없고... 다른 친구들은 입학준비를 한다며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나는 공부도 안 하고,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고, 문득 나는 아곳도 할 숭 ㅓㅄ다는 생각이 들어 한없이 외롭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자 나 자신조차 모르겠습니다.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남의 탁하지 너처럼 자기 자신을 탁하지 않아.  내가 보기에 넌 진실한 사람이야.  넌 지금 괴로워하고 있잖아.  괴로워하는 것, 그것일 바로 진실의 증거야."

그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은 완성형이 아니라는 것을.  진실이란 천성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식물처럼 자란다는 사실을.  흔들리고 괴로워하면서 진실이 커간다는 것을.  나는 시를 배우면서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괴로움이 커갈수록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실도 연스2ㅂ이 필요했던 것일까.

 

'상한 뿌리를 위하여'

 

뿌리를 반쯤 내어놓고

비스듬히 누운 겨울 상수리나무

가는 눈송이 몇 점, 그 윙 내려 앉아 있다

뿌리가 상한 나무라면 그마저 괴롭겠구나

나는 가지를 털어 눈을 치우려다, 만다

상한 뿌리라야 눈 내린 것을 알겠지

가지에 등을 기댄 희고 여린 것들

목숨을 부지하여 먼 허공을 날아온.

 

Live a full life

 

세월을 원망하지 말게

봄은 다시 오고

또 봄은 다시 온다네

시간은 공평하다네

훗날 주름진 모습이

우리의 삶을 말해주지.

 

 

과연 우리 운명은 자연의 주사위 놀이에 내맡겨져 있는 것일까. 로마인들은 우리 삶이 한편으로는 통제 불가능한 우연적 사태, 즉 '운(fortuna)'달려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우리 자신의 '힘(덕,virtus)'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우리 자신이 가진 힘만큼 우연에 대한 의존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련을 다루는 그 힘 혹은 덕성을 조금 다르게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강함이나 고귀함은 '운'을 물리치는 데 있는 것이아니라, 그것과 사귀는 것, 그것과 친구가 되는 법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연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삼는 게 진정한 강함이라는 이야기다. 이들에 따르면 우연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내 삶에서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연의 의미가 달라진다.

강자, 고귀한 자들은 '운'을 피해가는 자들이 아니라, '운'을 다룰 줄 아는 자들이다.  우연을 '유서 깊은 귀족'이라 불렀던 니체는 "나는 어떤 우연이든 냄비에 넣고 끓인다."고 했다.  자신은 우연을 요리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연주자란 그에게 우연이 생기지 않는 그런 이가 아니다.  그런 우연을 잘 요리하는 자이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은 어떤 기간이나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장밋빛 아름다운 용모가 아니더라도 마음속에 아직도 꺼지지 않은 열정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청춘이라 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사서' 고생하려는 이유는 인생에서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의미'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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